유둔리 |
원유둔 |
유둔의 마을 이름은 흥양 현감이 민정 시찰차 이곳을 지나다 물이 귀한 것을 보고 한곳을 파보라 하여 파보니 기름물이 유출되므로 그 샘을 “기름샘” 또는 “지름보”라 하여 마을 명을 “유둔”이라 하였다. 또,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기름같이 맑다하여 유둔이라 불렀다 하는데 현 동강면의 소재지이다. |
계매 |
바닷가나 민물에 서식하는 게가 뫼를 파는 형국이라 하여 예로부터 “게뫼”라고 불렸다. 당초 유둔리 덕암마을에 편입되었으나 ´89. 5월경 분동하여 마을이름을 나뉘면서 계(桂) 자와 매(梅) 자를 써서 현재의 계매가 되었다. |
덕암 |
예로부터 흥양에서 낙안으로 통하는 대로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쪽에 가죽(柯竹)나무로 놓은 다리가 있어 한때 마을 이름을 “가교(가다리)”라 불렀다.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 당시 원래의 마을 이름을 덕암(德岩)으로 고쳐 불렀다. |
중촌 |
원래 등촌(燈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마을과 마을 중간(中間)에 위치한다 하여 중촌(中村)으로 불렀다 하기도 하고, 대강면 중앙에 위치한다 하여 중촌(中村)이라고 불렀다는 유래(由來)가 있는데,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촌으로 분리 하면서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륜리 |
마서 |
옛날 선비들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말발굽 소리가 수레바퀴처럼 끝이 없었다 하여 “마륜(馬輪)”이라 불렀다 한다. 1956년 지방 행정구역 개편시 마륜리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마서(馬西)”라 칭불렀다. 동강면의 가장 서쪽 끝에 있는 마을로 대서면과 인접하고 있다. |
덕촌 |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德)을 갖춘 마을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마을이 나뉘면서 이름을 “덕촌(德村)”이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마동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동”, “마서”, “원등”을 합하여 마륜리(馬輪里)로 하였다가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마륜리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마동(馬東)”이라 하였다. |
축내 |
조선 중기 흥양현감과 관원들이 탄포(炭浦), 축내(築內), 사지곡(斜只谷)을 경유하는 도중 휴식처 겸 “음마지(飮馬池)” 또는 “한해방지(旱害防止)”를 위해 이곳에다 6,000여평의 방죽을 축조(築造)하여 속칭「방죽안」이라 불리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연축내(蓮築內)로 고쳐불렀으나 1947년에 다시 마을 이름을 “축내(築內)”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원등 |
옛 태강현의 근처에 위치한 마을인데 종계산의 한 줄기가 뻗어 고흥반도를 형성한 원맥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한 곳으로 부근에 원(院)이 있었으며 등성이에 있다 하여 “원등(院嶝)”이라 이름하고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륜리에서 분리 된 이후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대강리 |
사서 |
高宗 32년 을미개혁(乙未改革-김홍집내각의 근대적 개혁운동)으로 인하여 대강(大江)이라 불렀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옛 사창(社倉)이 이곳에 있어 사창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사서(社西)”라고 고쳐 부른 이후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사동 |
사동의 옛지명은 “사면교리(사교리)”였는데 대강천을 경계로 마을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강천을 건널다리가 4개가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사동은 조선시대 동면과 대강면의 사창이 있었는데 마을이 사창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사동(社東)이라 부르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두산 |
두방산(斗傍山) 아래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 연못에서 용(龍)이 산으로 올라 등천했다하여 산 이름을 「용각산」이라 불렀고 이 용각산 등성이에는 용뿔이라는 삼각형 긴 바위 두 개가 서 있으며, 조선 영조 당시 태강(泰江)을 사교리(斜橋里)라 칭하였으나 고종 32년 을미개혁에 따라 태강을 대강으로 고치고 본 마을은 두방산 중앙에 위치한다하여 두산이라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평촌 |
평촌의 옛지명은 “샘밭(샘바다)”이라 하였는데 들판 가운데 있어서 물과 샘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며 들판의 평야 가운데 있다고 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행정구역 개편당으로 “평촌(坪村)”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매곡리 |
당곡 |
매곡리에 속한 마을로서 조선중엽 이전까지는 마을 명을 “땅골”이라 불렀으며 그후 “당곡(棠谷)”이라고 부른 뒤 변동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쌍암 |
‘승평박씨(昇平朴氏)’ 비문에 의하면 1636년 조선인조 병자호란 당시에는 마을이름을 구도동이라 칭하였고 그 후 “귀덕골”이라 부르다가 별칭 “귀뚝골”이라 하였으나, 순조(1880년)때 마을뒤 큰 연못가에 바위 두 개가 있어 그 바위에서 낚시질을 하였다고 하여 “쌍암”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신정 |
서북쪽으로 지래산(일명 병풍산)이 감싸고 있는 매곡리에 속한 마을이며, 마을 지형이 주형(舟形)이라 하여 배에는 돛 대신 수목이 있어야 마을이 번창한다는 뜻으로 송성(宋晟)의 후손 송격(宋格)이 마을남쪽에 정자나무를 심어 신정(新亭)이라 불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 당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원매곡 |
본 마을의 뒷산은 비조암(飛鳥岩)과 병풍산(屛風山)이 주산을 이루고 동북간에 명산인 첨산(尖山)이 솟아 매화락지(梅花落地)라는 명당이 있어 첨산아래 마을을 이루어 한때 “첨산동(尖山洞)”이라 부르다가 뒷산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므로 원매곡이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한천리 |
신촌 |
옛날 동서남북풍이 잘 닿는 곳에 새 터를 잡아 마을이 생겼다하여 “샛터”라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신촌(新村)”으로 고쳤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변동 없이 분동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택촌 |
마을을 이룰 당시 연못을 발견하고 정착하였는데 물이 좋고 못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때부터 택전(澤田)이라 불러왔으며, 또 찬물 수원(水源)이 많아 한천(寒泉)이라고 했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시 집 택(宅)자로 바꾸어 택촌(宅村)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운동 |
서출동유(西出東流)의 옹달샘 물이 좋아 한때 수동(水洞)이라 불러왔으며 송(宋), 정(鄭), 이(李)씨 등이 새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룰 때 수도(修道)할 곳을 뜻하여 수동(修洞)이라 칭하다가 비조암이 있는 산 일대에 구름이 많이 끼므로 1956년 리동 행정구역 개편시 운동(雲洞)으로 개칭하여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오월리 |
세곡 |
지금으로부터 약 180여년전에 김해 김씨들이 살고 있었고 마을 이름을 “곰머리”로 불렀다. 오른쪽에 “새똠”, 왼쪽에 “다래기”라는 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새똠을 “선지(仙芝)”, 다래기를 “월악(月岳)”, 곰머리를 “세곡(細谷)”이라 호칭하면서 세곳을 합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현재 “세곡(細谷)”이라 부르고 있다. |
내대 |
내대는 마을뒷산이 소가 누워있는 지형(地形)이라 하여 “와우(臥牛)”로 칭하고 마을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기 때문에 “백이실” 도는 “벽계(碧溪)”라 불렀으나 옛날 바다에서 보면 안에 인가가 있고 정자나무가 서 있어 “안터”라고 하였으며, 같은 뜻의 한자로 “내대(內垈)”라 하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 당시 분동 되면서 변동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오수 |
원래 오월리에 속한 마을로서 옛날 노승(老僧)이 이 마을에 쉬어가면서 앞산을 바라보고 지형이 “비오닥지”형이므로 도(島)를 오(梧)로 고치라고 하여 오수(梧樹)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분동(分洞)되면서 변함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청송리 |
상송 |
조선시대 순종 말까지 “솔매등”으로 불러오다가 마을주위에 무성한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초대면장 강무영(姜舞永)이 마을 명을 청송(靑松)이라 개칭하였고,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청송리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상송(上松)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하송 |
청송리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하송(下松)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2년 기록에는 중송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상송으로 편입된 듯하다. |
죽암리 |
죽림 |
마을 앞이 강변이므로 모래가 많이 밀려왔 옛날 마을 명을 “모리목”이라 불러 왔으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마을전체가 대나무로 울창하였음으로 “죽림(竹林)”이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죽동 |
옛날에는 동내전체가 죽림(竹林)으로 우거졌다 하나 마을 명을 한때는 “모랫등목넘개”라 불렀고 또 시누대가 많아 “신죽”이라고도 하였으며 그 후 일제강점기에 죽동(竹洞)으로 개칭하여 변함 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옹암 |
죽암리에 속한 마을로서 마을연안으로 접한 포구(浦口) 남쪽에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마치 홀로 서 있는 형태(形態)라 하여 독암(獨岩)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제방을 막아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전경이 항아리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옹암”이라 불렀고, 1956년 분동 된 이래 변함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장덕리 |
관덕 |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보검출갑(寶劍出甲)의 지형으로서 「보배로운 칼이 칼집에서 나왔으므로 덕을 본다」는 뜻에서 관덕(觀德)이라 이름 하였으며,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마을이 분리되어 변함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장동 |
본 마을은 관덕 위쪽에 있으므로 “웃뜸”이라고 하였고 그전에 옹기점이 있어 점촌이라 하였으나 이곳 지형이 노루처럼 생겨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윗등을 모장등(母獐燈)이라 하며 건너편에 새끼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는 산이라 하여 이 산을 유장고모산(幼獐顧母山)이라 불러 ‘人倫의 情’을 상징하였으며, 마을 터를 “노루골”이라 부르다가 한자로 음차하여 장동(獐洞)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장월 |
마을지형이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어 “장달”이라 부른 것이 “장다리”로 바뀌었다하며 마을밖에 수 백년 된 하천(河川)에 “장다리”라 하는 목교(木橋)가 있어 마을 명을 한자로 장교(長橋)라 칭하여 오다가 고종 말 1815년부터 장월(掌月)이라 개칭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 당시 분동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노동리 |
병동 |
옛날 풍수지리설에 좌청룡(左靑龍) 우백호등(右白虎嶝)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 “골안”이라 불렸으며 또 금반옥지의 옥(玉)이 마지막 산 끝에 뻗었다고 하여 산세를 보아 옥산이란 마을이 생겼고 원병동(元屛洞)은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있어 조선 말기부터 병풍산(屛風山)의 정기 받은 마을이라 하여 원병동과 옥산 마을을 합하여 “병동”으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죽산 |
조선 인조 때(1630년)까지는 대산(岱山)으로 불러왔으나 그 후로는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마을 명을 죽산(竹山)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