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高興郡)의 역사적 유래
선사시대
1.선주민의 정착
삼면(三面)이 바다인 고흥반도 안에 원주민 인종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설사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동진해 들어온 무리에게 정복당하여 융화되었거나 다른 지방으로 유산되어 더러는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간 주민들도 있었으리라 본다.
우리고장 고흥에 입주한 선주민은 원시인들이 동쪽으로 생활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정착하였으리라는 점으로 볼 때 서해안을 거쳐 남하하였거나 산동반도에서 진입한 주민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2.석기시대와 고흥(高興)
본군 각처에 산재한 지석묘는 그 수가 5백여기에 달하고 계문토기 시대에 정착하여 살던 해안선 주변에서 그 흔적을 볼 수가 있고 또 각처에서 발굴된 석부 석도 석창 석기 철기시대의 유물도 발견된 것으로 이루어 볼때 우리고장 선주민들은 신석기시대부터 비로서 생활에 터전을 마련했고 그와같은 유물들을 용구로 수렵하여 정원 경작과 어로로 생활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선사시대의 유물
1) 유적은 고흥읍 고소리와 흥양면 엄포리 경계지점 해안주변에 구총이 무수히 매장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계문토기시대에 우리고장 선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다는 것을 고증할수 있다.
또 포두상포리 인근해변에 있던 구총외에도 육지와 떨어진 도서지방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본군 각처에 산재한 선주민들의 묘제인 지석묘와 옹관묘 수리 평촌부락을 위시 하여 각읍면별로 산재한 지석묘가 무려500여기가 있다.
이 지석묘형식은 남방식과 무지석식 지석묘가 대부분이다.
2)유물은 1928년 두원면 운대리 운암산능에서 농부 박화진이가 경작중 발굴된 석관속에서 동검편이 나왔는데 이는 요녕식동검으로 유병식석재인데 (청동기시대) 1932년 소록도 경생원의 토목 공사중 동경1개 지석묘 1개, 마제석족 6개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임이 확실하다.
1984년 4월 16일부터 5월 20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조사단이 포두면 장수리 수몰지구 지표조사 결과 발굴된 유물은 초기철기시대 토기류로서 유병식마제석검 1개와 토기편무문토기편 홍도편 김해식토기등이다.
1. 삼국시대까지
삼한(三韓) 시대에는 마한(馬韓)의 영토였다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백제의 땅이 되었으며, 백제가 사비(泗沘)로 도읍지를 옮긴 후에는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하였다.
의자왕 20년(660) 5월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백제가 망하고 그 옛 땅에 5개도독부를 두었다.
그후 전라남도에는 사양(沙洋), 대방(帶方), 분차(分嵯)의 3주가 배치되었고, 고흥군은 분차군에 소속되었다. 분차군(낙안군)은 4개의 현을 거느렸는데 고흥군 지역에는 조조례현(남양면), 두힐현(두원면), 비사현(동강면)의 3개현을 두었다.
2. 통일신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함에 따라 고흥군 지역도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에 종래의 복잡한 군현지명을 순 한자화 하여 분차군을 분령군으로 조조례현을 충렬현으로 두힐현을 강원현으로 비사현을 백주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진성여왕 때 견훤이 무진주(광주)에 근거를 두고 부근 일대를 정복하여 후백제를 세움에 따라 이 지역은 후백제의 땅이 되었다.
3. 고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제6대 성종, 14년(995)9월,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전남 지방을 해양도라 하였으며, 고흥군은 해양도 14주 62현 중의 3현이 되었다.
제8대 현종 9년(1018)에는 해양도와 강남도(전북)를 합하여 전주와 나주의 이름을 따서 전라도로 개칭하고 그 치소를 전주에 두었다.
이보다 앞선 태조 23년(940)에는 충렬현을 남양현으로 강원현을 두원현으로 백주현을 태강현으로 고쳐 나주목에 딸린 보성군에 두었다.
고흥현은 본래 장흥부에 딸린 고이부곡이었는데 고이는 고양이의 속어라고 하며 충렬왕 11년(1285)에 이 고을 사람인 유청신이 원나라의 사신으로 여러 번 큰 공을 세웠으므로 고흥현으로 승격시키고 감무를 두었는데 고흥이라는 지명은 고이와 장흥의 합명으로서 조선조에 등장한 흥양 보다도 더 오래된 지명이다.
풍안현은 보성군에 딸린 식촌부곡이었는데 충선왕 2년(1310)에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운 이대순의 청에 의하여 풍안현으로 승격되었으며 도양현은 본래 장흥부 도량도부곡이었는데 고려에 와서 도양현으로 승격되었고 도화현은 보성군의 타주부곡이었는데, 명종 27년(1197)에 도화현으로 승격되어 고흥지방에는 모두 7개의 현이 있었다.
4. 조선이후
태조 4년 에 왜란으로 인하여 보성군 조양현땅에 치소를 임시로 옮기고 같은 6년(1397)에 진을 두어 병마사가 현감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태종 16년(1416) 전국을 8도로 정할 때에 전라도의 좌도에 소속되었으며 세종 5년(1423)에는 이곳에 첨절제사를 두었다가 같은 23년(1441)에는 보성군에 딸린 남양현 두원현 등 7개의 현을 합하여 고흥과 남양의 뒤 글자를 따라 “흥양현”으로 고쳐 불렀다.
이곳은 또한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한 5관 5포 가운데 사도첨절제사(종3품 영남면 금사리)를 비롯하여 발포(도화면 발포리), 녹도(도양읍 녹동), 여도(점암면 여호리)에 수군만호(종4품)를 두어 1관4포의 진을 설치한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충무공함대의 주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이지방의 여러 장수가 국난극복에 모두 참여하여 많은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었다.
영조 때의 기록에 ‘고흥은 예부터 별칭 영주(한라산)와 같은 이름으로 산과 바다가 맑고 아름다우며 기승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 예부터 등과자(과거에 급제한 사람)가 많을 뿐 아니라 용력이 뛰어난 역사가 많으며 지금도 정계, 학계, 관계, 체육계 등 각 분야에 진출한 고흥출신의 인물이 많다. 당시의 흥양현은 호수가 9,977호로서 인구 41,996인이며 남자가 18,559인 여자가 23,437인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5,000여명이나 더 많았다.
고종 26년(1895)지방제도 개혁에 의하여 흥양현을 흥양군으로 바꾸고 13개 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돌산군의 득량도 등을 합하여 고흥군으로 개칭하고 13개 면을 관할하였으며, 1973년 7월 1일 도양면이 도양읍으로 1979년 5월 1일 고흥면이 고흥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전라남도 5시17군의 하나로 2읍 14개면 2출장소 515개의 행정부락을 관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