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담리 |
장담 |
옛 표기에는 장담(長談)리로 표기 되었고 1912년에는 장담(長潭)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양면 지역으로 월악, 장담, 송정, 서거, 옥천 등의 마을 일부를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당시 고흥군 남양면 장담리로 하였다가 해방 후 장담마을이 되었다. 장담은 긴 못이 있어 “진대미(못)”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덕촌 |
마을의 형국(形局)이 마치 밤알을 안고 있는 밤송이와 같이 생겼다 하여 마을명을 “밤방굴”이라 불리어 왔으며 밤방굴을 한자로 음차하여 율동(栗洞)이라 칭하여 오다가 1956년 장담에서 덕촌마을로 독립되면서 이는 해방된 덕(德)이라는 뜻으로 덕촌(德村)이라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월악 |
월악산(月樂山)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다래기(달)”라 칭하여 왔으며 월악산(月樂山) 또는 다래(多來)산으로 바뀌어 부를 때 산을 따서 다락(多落)마을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1956년 리동행정 구역개편에 따라 장담마을에서 독립되면서 월하풍락(月下風樂)의 준말로 마을 이름을 월악(月樂)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송정 |
마을이름은 “웃거해(巨蟹)”라고 했는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의하면 송정(松亭), 서거(西巨), 동거(東巨) 등 3개 마을을 거해라 부르며 지형이 큰 게 해(蟹)자 형국이라 하여 송정(松亭)을 “웃거해(巨蟹)” 또는 “상거(上巨)”라 불러오다가 1914년 마을 이름을 송정(松亭)으로 고쳐 불렀고 마을 서쪽에 큰 바위가 마을에 보이면 해(害)가 된다하여 소나무를 울창하게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군용물질(軍用物質)인 송탄유(松炭油)를 짜기 위하여 1942년 이를 벌목 했다는 구전(口傳)이 전해 온다. |
거해 |
원래 거해(巨蟹)에 속하며 월악산지맥(月樂山支脈)이 동쪽으로 뻗어 내린 터꼴(下嶝)에 위치하므로 하거(下巨)라 불러오다가 1914년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 강점기 초기에 하거(下巨)를 각각 분리하여 마을 명을 서거(西巨)로 하였다가 2004년 2월에 거해(巨蟹)로 고쳐 부르고 있다 |
동거 |
본래 거해(巨蟹)에 속한 마을로서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강점기 초기(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분동(分洞)되면서 마을 앞 큰 들이 있고 그 들판의 동쪽에 위치한다하여 마을 이름을 동거(東巨)라 부르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옥천 |
마을 지형이 고깔안과 같다하여 당초 마을명을 고깔 변(弁)자와 안 내(內)자를 써서 “변내(弁內)”라 하였고 혹은 터꼴(基洞)이라고 불리어오다가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강점기 초기(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 당시 마을형국을 제왕산지형(帝王山地形)에 비유, 이곳이 제왕(帝王)의 식수정(食水井)이라하여 마을에 있는 샘물이 마치 옥(玉)과 같이 맑다하여 옥천(玉泉)으로 고쳐 불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흥리 |
거군 |
원래 마을 이름을 “거군지”(巨軍地)라 불렀는데 마을뒷산의 주봉인 제왕산하(帝王山下) 남서쪽에 위치하고 마을 앞들에 많은 군대가 주둔할 곳이라 하여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로 거군지라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초기(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편 당시 마을 이름을 거군지(巨軍地)의 지(地)자를 떼어버리고 “거군(巨軍)”이라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장동 |
마을 옛이름은 “막촌”, “고막리”라고 하였는데 마을에 맨 처음 들어온 절강편씨가 묘 옆에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하여 막촌 또는 고막리라고 불렀다. 장동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절강편씨가 입향 후 김녕김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집을 짓지 못하고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장동(帳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신직 |
원래 마을 이름을 “신직기미”라 불렸는데 옛날 제왕산(帝王山)의 전설에 의한 것으로 정직한 신하(臣下)가 사는 곳이라 하여 “신직(臣直)” 신직기미라 하다가 일제강점기 초기(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편 당시 “기미”를 떼어버리고 ‘신직(臣直)’을 ‘신직(新直)’으로 고쳐 불렀으며, 1956년 리동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거군(巨軍)에서 분동(分洞)되면서 신직마을로 독립됐다 |
덕동 |
마을의 옛이름은 “큰덕굴”로 신진사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바다로 인하여 큰 덕을 볼 것이라하여 “큰덕굴(큰덕골)”이라 불러 오다가 이를 한자화 하여 “덕동(德洞)”으로 하였다. |
주교 |
주교의 옛이름은 “배다리”로 불러왔는데 배다리란 약80여 년 전 굴개방죽을 막기 전까지는 조수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배가 입출항하였기 때문에 “배다리”라 하였고, 마을의 지형이 육지에 매달아 놓은 수십척의 배와 같다하여 배다리라 하였다. 주교는 이 배다리를 음차(音借)하여 주교(舟橋)라 부르게 된 것이다. |
대곡리 |
상와 |
원래 마을 이름은 김녕김씨 김원수가 천방산(天尨山)의 지맥(支脈)이 달려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내린 형국(形局)이 마치 바닥기와가 깔려있는 것처럼 생겼다 하여 기와 와(瓦)자와 들 평(坪)자를 써서 “와평(瓦坪)”이라고 한 것이라 한다. 와평(瓦坪)은 상와(上瓦), 골안, 중와(中瓦), 하와등(下瓦等) 4개 마을을 말하며 상와(上瓦)를 상단(上壇) 혹은 상미(上尾)라고도 하다가 일제강점기 당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단(上壇)에 있다 하여 “상와(上瓦)”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골안 |
원래 중와리와 연합리였을 때는 와평, 향기정, 중단, 중미, 중와등으로 부르다가 해방 후 중와리 와 분리 되면서 골안이라 이름 하였는데, 골안이란 마을의 뒷등인 남정자등(南亭子嶝)을 주령(主嶺)으로 하여 서(西)쪽의 임정등(嶝)과 동(東)쪽의 새산등(嶝)과의 사이의 골짜기 안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순 우리말로 “골안”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중와 |
마을 이름은 향기정, 와평, 중단, 중미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중와(中瓦)라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하와 |
마을의 이름은 와평, 상단, 하미등 여러 가지의 마을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와(下瓦)라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노송 |
옛날에는 노송정(老松亭)이라 불렀다는데 그는 옛날 조방호씨택 부근도로변에 큰 노송(老松) 한 그루가 서있어 이 노송의 그늘 밑은 오가는 길손의 쉬어가는 휴식처 였다고 하는데 이를 마을 이름으로 하여 노송정(老松亭)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정(亭)자를 빼고 “노송(老松)”이라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남양리 |
남양 |
옛날에 “버들내” 혹은 “버드내”라 불렀다는데 이는 마을 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버들내 또는 버드내라 불렀는데 이를 음차하여 버들 양(楊)자와 물 강(江)자를 써서 “양강(楊江)”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버들내니 버드내 혹은 양강등(楊江等)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역원(驛院)이 설치되기 이전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같이 “버들내”, “버드내” 또는 “양강등(楊江等)”으로 조선 말기까지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이 1914년에 실시 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南陽)”이라 고쳐 불렀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의 남양현의 고현지(古縣地)라 하여 남양(南陽)으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기동 |
옛날 “텃골”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텃골’을 한자로 음차하여 터 기(基)자와 골 동(洞)자을 써서 기동(基洞)이라 부르며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
우도 |
마을 이름이 맨 처음에 “소섬” 혹은 “쇠섬”이라 불렀는데 이는 섬에 가로 13m, 세로 8m 가량되는 우두형(牛頭形) 암석(岩石)이 있어 소섬, 혹은 쇠섬이라 하였으며, 이를 음차하여 우도(牛島)라고 했다 한다. 또는 이 섬에 자생 한 대가 많으므로 황씨(黃氏)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이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국가에 바쳐 그 화살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고 하며 따라서 마을 이름도 우죽도(牛竹島)라고 고쳤다가 대나무 밭이 없어지면서 황씨(黃氏)들도 사라지고 이씨(李氏)들이 들어와서 살면서 우죽도(牛竹島)라는 이름에서 죽(竹)자를 빼고 우도(牛島)라 다시 부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400여 년 전에 과역면 백일도에 사는 밀양박씨 한 분이 대제학을 지낼 때에 우도를 국가로부터 녹지로 받았다가 뒤에 딸을 대서면 화산리 여산송씨 가문으로 출가 시키면서 예물(禮物)로 준 우도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중산리 |
중산 |
이 마을은 남양산성을 주봉으로 하여 마을 뒤는 청산(靑山)이 둘러있고 좌측 산맥은 청룡등(靑龍嶝)을 이루고 우측 산맥은 백호등(白虎嶝)을 이루어 마을을 옹호(擁護)하며 득량만의 창해(滄海)를 바라보고 있어 마을 안이 마치 소쿠리테안과 같아서 마을 안에 들어서면 이웃마을의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중과 같은 지형을 살려서 산중(山中)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어 마을 이름을 “중산(中山)”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운교 |
이 마을은 옛날부터 구전에 의하면 약 300여 년 전 조선 숙종연간으로 추정되는데 그 당시 선인들이 마을 이름을 “두루실(주곡, 周谷)”이라 불렀으며, 구한말(舊韓末)까지 약200여 년간 불러오다가 일제강점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름다리“(운교, 雲橋)”라 개칭(改稱)하게 된 것이다. “두루실”이라 함은 마을 안이 두루 골짜기라 하여 “두루실(주곡, 周谷)”이라고 한 것이며, “구름다리(운교, 雲橋)”라 함은 그 당시의 지방명물이었던 구름다리의 다리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운교(雲橋)”라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월정리 |
선정 |
옛날 마을 이름을 전포(電浦)라고 부르다가 그 후(後)에 선정(仙亭)이라 고쳐 불렀다. 선정(仙亭)이라 함은 조선 세종23년(1441)에 태강현(泰江縣)이 흥양현(興陽縣)으로 편입 되면서 당시의 현감이 순찰차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에 즐비한 수목을 보고 그 “수려한 경치는 신선이 놀 수 있는 별유천지”라 하며 마을 이름인 전포(電浦)를 선정(仙亭)이라 고쳐 부른 것이라고 전한다. 선정, 주암, 왕주등 3개 마을을 합하여 월정(月亭)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을앞 바다인 여자만(汝自灣)을 건너 멀리 바라보면 여천군 화양면 산정에서 떠오른 달(月)이 마을의 정자(亭子)나무에 비치는 광채가 아주 화려하다 하여 “월정(月亭)”이라고 했다 한다. |
주암 |
옛 마을 이름은 “진등” 혹은 “두룸바우”라 불렀는데 진등이라 함은 망주산(望珠山)의 뒷 산맥이 길게 뻗어내려 왔다하여 “진등”이라 불렀으며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왕주에서 분리되면서 주암(周岩)이라 고쳐 불렀는데, 주암(周岩)이란 마을주변에 바위가 많다하여 “두룸바우”라 했는데 두룸바우를 음차하여 “주암(周岩)”이라 부른 것이다. |
왕주 |
옛날 마을 이름은 지형(地形)에 따라 왕(王)거미 머리라 하여 “왕주머리” 혹은 “왕지머리”라 하여 이를 음차 “왕주두리(王蛛頭里)” 혹은 “왕지두리(王蜘頭里)”라 하다가 일제강점기 1914년에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왕주(王蛛)라 하였다. 원래 남서면 이었던 왕주는 남양면으로 편입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망주리 |
덕흥 |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신기, 新基)”라고 부르다가 그 후에 마을앞 바다에 있는 자그마한 섬이 물에 떠있는 오리와 같다하여 “부도(鳧島)”라 고쳐 불러 오다가 주민들의 건의로 2007년 10월 “덕흥(德興)”으로 변경하였다. |
망동 |
망동의 옛지명은 “골몰” 혹은 “동편”이라고 불렀는데 골몰이라 함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골마을 즉 “골몰”이라 했으며, 동편이라 함은 망주리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편(東便)”이라 부르다가 일제감점기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망주리(望珠里)의 동(東)쪽 마을이라 하여 “망동(望東)”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와야 |
와야는 옛 이름이 망주리 서쪽에 있다하여 “서편(西便)”이라하다가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이라 하여 와야(臥野)라고 고쳐불렀다. 일제강점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서면이던 마을을 남양면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와야(臥野)를 “와야(瓦也)”로 고쳤다. 이는 마을 지형이 기와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하여 “와야(瓦也)”로 바꾼 것이다. |
평촌 |
옛날에 “들말” 또는 “들몰”이라 불렀는데 들말이란 들마을의 준말이며 들몰이란 우리지역의 방언(方言)으로 들마을을 “들몰”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들마을이니 또는 들말 혹은 들몰 등을 한자(漢字)를 훈차하여 들 평(坪)자와 마을 촌(村)자로 써서 평촌(坪村)이 된 것이다. |
잠두 |
잠두의 옛 지명은 “눼머리”, “누에머리”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마을의 지형(地形)으로 보아 서쪽의 백호등이 누에머리와 같이 생겼다하여 마을 이름을 “누에머리” 혹은 “눼머리”라 부르며 이를 음차하여 “잠두(蠶頭)”라 부르고 있다. |
침교리 |
화담 |
화담 마을의 옛 지명이 “고담(古潭)”으로 장고담이라는 옛터에 황씨, 김씨, 도씨 3성이 살면서 장고담에서 장을 빼고 고담이라 했다 한다. 그 후 마을 지형이 연못같이 깊숙한 연못 같다고 하여 화담이라 고쳐 불렀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마을 설명은 꽃을 보고 날아드는 나비 형국이라고 하는데 채일봉과 양애등을 나비의 양쪽 날개로 보고 마을 전체를 몸둥이로 보며 촌전 앞 당산등을 꽃으로 보고 그 당시의 풍수지리가들이 화담(花潭)이라 고친 것인데 이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마을의 지형을 마을이름에 내포시킨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
침교 |
침교마을의 옛지명은 “자문다리”, “잠은다리(잠근다리)”라고 하였는데, 방죽을 막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돌다리를 놓고 마을을 드나들었는데 물이 들어오면 다리가 잠기고, 물이 빠지면 다리가 드러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침교는 잠은다리를 한자화한 것이다. 입향 배경을 살펴보면 선조연간에 여산송씨 송시엽이 남서면 송강리에서 입향하였고, 1821년에 금성나씨 나기용이 승주군에서, 천안전씨 전동용, 나주임씨 임정묵, 창원박씨 박춘원, 고흥류씨 류치준이 차례로 입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
아평 |
아평마을은 “만해바다” 혹은 “아평(鴉坪)”이라 불렀는데 약4백 년 전의 풍수가의 예언에 의하여 마을 앞에 큰 바다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만해(滿海)바다라고 마을이름을 부쳤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평(鴉坪)”은 까마귀가 시체를 보고 쪼아 먹기 위해 나는 형국, 즉 비오탁시(飛烏啄屍)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검은 갈가마귀는 마을 앞의 안산(案山)이며 죽은 사람의 시체(屍體)는 마을 앞 저수지 밑에 길게 뻗어있는 벌판을 말한 것이다. |
탄포 |
탄소의 옛지명은 동국여지승람에나 군지(郡誌)에 따르면 “입포(入浦)” 혹은 “숯개(탄포(炭浦))”라고 되어 있다. “입포”는 서쪽 득량만의 해안선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며, 숯개의 연원은 2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질매산 서북쪽 중턱에서 사탄이 나와 붙여졌고, 둘째는 마을 부근에서 숯을 구웠다고 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숯개를 한자화하여 탄포라고 하였다. 원래 마을은 남서면이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면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숯개”라는 마을 이름을 음차(音借)하여 “탄포(炭浦)”라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