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 통일신라(757) : 장흥부(長興府)의 고이부곡(高伊部曲)
- 고려조(1285) : 충렬왕(忠烈왕) 11년 장흥부(長興府) 고흥현(高興懸)으로 개칭
- 조선조(1441) : 세종대왕(世宗大王) 23년 흥양현(興陽懸)으로 개칭
- 조선조(1765) : 영조(英祖) 때 도양(道陽) 관리(官里)에 감목관(監牧官:종6품)하에 속하는 도양목장(道陽牧場)의 속장(屬場)으로 말(내나로도 139필,외나로도119필)을 놓아 기르는 세납목장(稅納牧場)이 있었음(관할구역:나로도,시산도,소록도,절외도)
- 조선조(1789) : 정조(正祖) 13년 여지도서(輿地圖書)나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된 나로도(羅老島) 10개리(個里) 예하(曳下), 내소초(內召草), 외소초(外召草),시구미(柴仇味),애도(艾島),사양(泗洋),백초(白草),양화포(楊花浦),대역포(大驛浦),방축구미(防築仇味) (10개리.508호 . 2,21 2명(남1,061명 여 1,151명)
- 한말(1895) : 고종(高宗) 32년 돌산군(突山郡)에 속하여 서병수 군수로부터 봉래면(蓬萊面) 이름 명명(동방 삼신산의 유래에 하여 작명함)
- 일제(1914) : 돌산군(突山郡)에서 고흥군(高興郡)에 편입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 1963.1.1 : 시산리(矢山里)을 풍양면에 , 지죽리(支竹里)를 도화면에 ,오취리(梧翠)를 포두면에 각각 이관
- 1973.1.1 : 사양리(泗洋里) 하도(鰕島)를 도화면 사덕리에 이관
- 1990.7.1 : 내나로도(內羅老島)를 동일면(東日面)로 분면
- 1994.11.30 : 연육교(連陸橋) 준공 (남성리 - 동일면) 나로1대교(380m)
- 1995.10.15 : 연도교(連島橋) 준공 (동일면 - 봉래면) 나로2대교(450m)
지명유래
신금리 (新錦里) |
신금 (新錦) |
마을 뒤쪽 당묘산의 지형이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신구미라 부르다가 195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래면의 발상지라 하여 신금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하황제승(大夏皇帝昇)의 후손인 연안(延安) 명도리(明道理)는 1625년경 조선(朝鮮) 인조(仁祖)때 해주오씨(海州吳氏)의 딸과 혼인하여 입기설촌 (入基設寸)한후 1716년경 남양(南陽) 홍구석(洪九錫), 김해(金海) 김봉순(金鳳純), 1746년에 전주(全州) 이계영(李桂英)이 입주하여 형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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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 (元頭) |
일제 때 바다를 막아 농토를 만들기 위해 방파제를 축조했는데 이 방파제 위에 위치한다 하여 ‘원머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를 음차하여 원두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원래 신금리에서 독립된 마을이다. 1920년경 풍양면 삼각마을에 거주한 제주(濟州) 고덕진이 어업에 종사하기 위해 이 곳으로 들어와 설촌했다. | |
진기 (陳基) |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일시 주둔지였다는 유래로 진터라고 불렀으며, 그 당시 4∼5가구에 불가하였으나 호수가 늘어 194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금리에서 분리되면서 진기라 불렀다. 1800년경 조선 순조(純祖) 때 여천군에 거주한 안대구가 처음 입기(入基)한 다음 보성군에 거주한 황덕성이와 능주구(具)씨가 입주 설촌했다. 봉화터(불논골)에 봉화를 올렸던 흔적이 있고, 병막터(전염병 환자 수용한 곳), 선창터(조곡을 운반한 곳), 나라끝터(축정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나루터), 진물등(진기 와 교간에 가장 좁은 곳) 등이 있다. | |
축정 (築亭) |
축정(築:쌓을 축. 亭:정자 정) 쌓아서 생긴 동네라는 뜻이다. 본래 지명은 치끝으로,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인들이 입주하면서 바다를 메웠다고 하여서 축정이라고 하며 198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축정1구, 축정2구로 분리되었다. 소재지로 포구(浦口)가 좋아 이순신(李舜臣)장군 때 거북선이 연해(선채 바닥을 불로 태움)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 |
엄남 (嚴南) |
풍수지리상 대왕낭금지형(大王娘錦地形)이라 하여 옥랑금(玉娘錦)이라 하였으며, 옛날 이곳에 엄나무 정자가 있어 엄남 또는 엄남정이라 부르다가 1946년 행정구역 개편시 엄남이라 칭함. 1902년경 조선 고종(高宗)말 완도에 거주한 오동용(吳同用)이 외초 김씨의 딸과 결혼하여 이곳에 입기정착(入基定着)한 후 김해(金海) 김명중(金明中), 창원(昌原黃) 황재숙(黃在淑) 등이 입주하였다. 1910년경 일본인의 화장터와 공동묘지(일본인)가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일본인이 설치한 어물가공공장(새우, 멸치)이 있다. | |
동광 (東光) |
마을 토질이 진흙이어서 예부터 사기그릇을 많이 구워냈다 하여 사계(史溪)라 하였으며 또한 태풍이 오면 마을 남쪽에 조기가 밀려와서 조기를 많이 주웠다하여 한때 조구나리라 부르다가 196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동광으로 개칭되었다. 1810년경 조선 순조(純祖)때 도덕면에 거주한 김종진(金宗鎭), 장봉공(張奉公)이 현 수원지터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 후 고익삼(高益三)외에 이씨(李氏), 박씨(朴氏), 고씨(高氏) 등이 입주하여 설촌 하였다. 옛날 사기를 구웠다는 가마터가 동광리 수원지 안에 있었고 부근에 가끔 토기 흔적이 발견된다. | |
비치 (飛峙) |
예부터 비자나무가 많이 자생하였으며, 비자가 유명하여 비재라고 불리어 오다가 196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비치로 개칭 되었다. 마을 남쪽 망바위, 동남쪽 게짱등 북쪽은 염생이 바위, 동쪽 산은 노루 같다하여 노루나루, 동북쪽은 범바위 등이 있다 | |
예내리 (曳內里) |
내초 (內草) |
조선시대에 도양목관에 속하는 목장지로써 새칼(소몰)이 많아서 이곳을 좀새라 불렀는데 풀이 적게 있는 동네라 해서 작은좀새라 하였으며, 1880년 내좀초라 부르다가 1910년 이후 약칭하여 내초라 하였다. 1680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승주군 주암에 거주한 정원경(鄭原慶)이 피난 차 이곳에 입기설촌(入基設村) 했다. |
교동 (校洞) |
조선 고종43년 흥양현에 속했을 때 마을 이름을 내점치라 부르다가 그 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초라 하였고 1963년 주민들의 합의에 의하여 마을 중심 하천을 경계로 남쪽은 내초, 북쪽은 남초등교가 있어 교동이라 하였다. 1680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노정양이 입기설촌하였다 | |
창포 (滄浦) |
옛날에 장사가 창포끝 산을 봉남의 머리 끝에 이으면 좋은 항구가 되겠다고 생각하여 창끝을 이용하여 산을 떼어 가려고 하는데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산 떼어가네 하는 소리에 창구멍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전설로 인하여 창포라 하였다. 1860년경 조선 철종(哲宗) 때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입기설촌하였다 | |
예내 (曳內) |
원래는 돌산군 봉래면의 지역으로 예하, 내동 두 마을을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두 마을 머리글자를 따서 예내리로 하였으며, 봉래면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하고 그 전 예하마을의 골짜기 안에 있으므로 예내라 하였다. 1700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이희익(李希益)이와 경기도 광주에 거주한 밀양(密陽) 박만수(朴晩秀)가 난세(亂世)를 피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전전하다가 이곳에 입기설촌하였다. 일제시 우리면민의 노력으로 식재한 삼(杉)나무, 편백(扁柏)나무 1만5천여주가 울찰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 |
예당 (禮堂) |
원래 예하마을과 행정구역이 같았으나 분동됐으며 마을 입구에 수호신을 모시는 상당(上堂)에 사기로 조각된 한쌍의 말이 있으며 약 500여년 전부터 매년 정초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예의바른 마을이라 하여 예당이라 하였다. 입향연대는 미상(未詳)이나 남양(南陽) 홍중영(洪重榮)이 입향하였으며 차례로 이씨(李氏),박씨(朴氏) 등이 입주하였으나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자자일촌을 형성했다. 원래 목장지대로서 예부터 말을 숭상하는 민속신앙(民俗信仰)으로 마신제(馬神製)를 모신다. | |
하반 (河盤) |
신금, 뻘금, 청석금, 하반금에다 5금을 더하면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하반금이라 불렀으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약칭하여 하반이라 하였다. 현재 우주센터 부지편입으로 마을이 없어졌다. | |
외초리 (外草里) |
외초 (外草) |
옛날에는 지금의 외초마을을 큰좀세라 하였으며 그 후 초대 서병수 돌산현감이 내초, 외초라고 명명하였고 염포와 상초가 본마을에 속하다가 1927년 염포, 1956년 상초가 분리되므로써 바깥좀세를 한자로 외초라 하였다. 1675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광양이 태생지인 동지중추부사 밀직장(同知中樞府事 密直長) 초계(草溪) 최우복(崔宇福)이 이곳에 입향(入鄕)하였으며 그 무렵 김해(金海) 김윤순(金胤淳)이 함께 입기설촌했다. 마을 뒷에는 덤바위 산이 우뚝 서있고, 마을 앞에는 300여년을 헤아리는 해송(海松)이 숲을 이루고 있는 천혜(天惠)의 마을이다. |
상초 (相草) |
옛날에는 큰좀새인 외초(外草)마을에 속하였으며, 간척지를 막기 전에는 조수(潮水)에따라 바닷물이 썰물일 때는 육지가 되나 밀물일 때에는 섬이 되는 현상을 비유하여 섬좀새라 불렀다, 1956년 분동할 때 외초마을 동로(洞老) 노원숙(盧源淑)옹이 외초(外草)와 서로 마주 본다는 뜻에서 상초라고 명명하여 주었다. 미상이나 외초에 입향이래 수년 후에 입주한것으로 본다. 마을 뒷면은 기암절벽(奇巖絶碧)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바다이므로 사방에 낚시터가 많다. | |
염포 (鹽浦) |
원래 본 마을은 앵금이, 안동네, 개안으로 구성하여 형성되었으며 송개라 함은 커다란 가마솥을 걸어놓고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다는 유래가 있으며 소금을 구운 곳을 가마제라 부르오직기산 화강암절벽은 하얀부채 같이 생겼다고 부채바위라 부른다 본시 소금개라 부르다가 송개로 바뀌었으며 같은 뜻의 한자로 염포라 칭하여 와초마을에 속하였으나 1927년 분동되었다. 1690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충주에 거주한 충주(忠州) 지정손(池廷孫)이 이곳에 중촌(中村)에 입주하였고, 앵금마을에 김해김씨(金海金氏), 개안에 양주추씨(楊洲秋氏)와 초계초씨(草溪草氏)기 입주하여 설촌하였다. 바닷물 속에 누워있는 미룩바위, 봉래면 최남단에 위치한 꼭두머리 같이 생긴 섬 곡두여, 탕건과 같이 생긴 섬 탕건여 등이 있다. 해방 후 한국수산 권위자 지철근 박사, 12,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연태씨가 태어난 곳이다. | |
사양리 (泗洋里) |
사양 (泗洋) |
옛날 이 섬에 우뢰가 떨어져 뢰섬(雷島)이라 하였다는 설과 시집가는 새색시를 실은 배가 각시여에서 침몰, 로(櫓)가 밀렸다 하여 로(櫓)섬이라고 불렀으며, 사면이 바다여서 사양이라 하였다. 1700년경 조선 숙종(肅宗) 때 영암에 거주한 김덕상(金德祥)이 난세(亂世)를 피신하이 위하여 이곳에 입도(入島)했으며 장성에서 고한옥(高漢玉)이, 고흥 동강에서 신중호(申重昊)가 차례로 입주하여 설촌하였다. 산중턱에 삼복(三伏) 더위에도 시원하다는 굴이 있는데 옛날 중이 살아갔다 하여 중굴이라 한다. |
선창 (先昌) |
사양도에 있는 마을로 배가 닿는 곳이므로 선창이라 하다가 음차하여 선창으로 표기하였으며, 원래 사양마을에 속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분리되었다. 미상이나 사양이 입행이래 수년 후에 입주한 것으로 본다. 1978년 농어가소득조사에서 전국1위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은 마을이다. 마을 뒷산은 봉화산이며 산에 용 발자욱과 사람 발자욱이 있어 일명 용발자국이라고도 한다. | |
봉호 (蓬湖) |
큰섬, 작은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의 형국(形局) 소가 누워있는 모양이라 하여 와우형(臥牛形)라 했고 약쑥이 무성해서 쑥섬(애도:艾島)이라 하며 동남북이 막혀 호수 같아서 봉호라 부른다. 1665년 조선 현종(顯宗) 때 장흥 관산에서 박종립(朴宗立)이 이곳에 입도설촌 하였으며, 북쪽 산봉(山峰)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옛날 신선(神仙)들이 놀았다는 신선대(神仙臺)가 있고, 바로 옆에 중이 빠져 죽었다는 중빠진 굴이 있다. 마을에 후박(厚朴)나무와 동백(冬栢)나무가 유명하다. | |
수락 (水落) |
수래기라고도 하고 수락도(水落島)고도 하며 수래기 섬을 같은 음의 수락(水落)으로 표기하고, 옛 문헌에는 수락도(水樂島)로 표기되었다. 외나로도에서 20리 떨어진 외딴 섬으로 해산물이 풍부하며 경관이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