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공식 웹사이트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본문 바로 가기

우주항공중심도시 고흥

우주항공중심도시 고흥

인구 10만 비전

연혁

  • 백제시대 : 비사현
  • 고려시대 : 보성군 태강현
  • 조선세종 23년 : 흥양현
  • 조선후기 : 남서면과 태서면 분리
  • 1914. 3. 15 남서면과 태서면을 통합 대서면으로 개칭

지명유래

대서면 지명유래-금마리,남정리,안남리,화산리,송림리,송강리,상남리
금마리 석장 1930년 상남리 남양마을에 있던 면사무소와 파출소가 면의 중심지인 석장마을로 이전되면서 인가가 증가 되어 면소재지 중심마을로 형성 되었다. 1951년 금당마을로 부터 분리되었고, 인근에 돌이 많아 “석바탕이”, “섭바탕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석장(石場)”이라고 불렀다. 북쪽 봉두산 자락 면의 중앙에 위치하여 각급기관이 군집하고 있다.
금당 조선 문종때인 1420년경 김해김씨와 서씨가 입향 너멍굴에 봉림촌(鳳林村)을 열었고 1498년 무오사화의 난세를 피해 은거 정착한 고령신씨를 위시한 유씨, 오씨, 송씨 등이 지금의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봉림촌은 마을 뒤에 봉두산이 있고 나무가 무성하여 붙여졌다가 뒷산에 금맥이 있고 앞에 연못이 있어 금당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마을 뒷산에 광산이 있었다고 전하기도 하며, 금당이 사찰(불교)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개명 고려 충선왕때 제주고씨가 처음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후 조선 성종 11년(1480) 경기도 수원에서 인동장씨가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봉두산 아래에 화전등과 반월등이 있어 달이 비추면 밝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개명(開明)”이라고 했다.
마암 마암마을 옛지명은 “몰바우(말바우)”로 산에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취령산 중턱에 4m 정도 높이의 말 형상 자연석이 있는데 옛날에 장군이 봉두산에서 취령산으로 말을 타고 가다가 낙마하여 장군은 죽고 말은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말바위라 하고 훈차하여 “마암(馬岩)”이라 하였다.
남정리 축동 축동은 지형이 소(牛)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축동(丑洞)”이라 부르다가 그 후 송현(松峴), 서항(西航), 보진(寶津) 등으로 개칭하였으며, 1917년에 “송정(松亭)”이라 불르다가, 1956년에 장전마을이 분동되면서 마을 이름을 “축동(築垌)”이라 부르고 있다. 구전에 박씨 부자가 살았는데 마을주위에 성을 쌓고 살았다 하여 축동이라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장전 년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장씨가 살았는데 30여 리를 걸어도 장씨의 밭(田)이라고 하여 “장전(長田)”이라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고, 옛 이름이 “진밭”으로 긴 밭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전이라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초 송정리에 속했다가 1956년에 분동되어 남정리 장전마을로 독립 현재에 이르렀다.
월등 마을에 느룹나무 정자가 있어 “느룩정”이라 불리어 오다가 1870년경 마을 앞에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있고 뒷산 해월봉(海月峯)에서 뜨는 밝은 달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다고 해 마을 이름을 “월등(月登)”이라 불러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남당 고흥군과 보성군의 군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정조 때 영광 정응진 씨가 화순군 도곡면에서 이주 해왔고, 남쪽에 해당되고 그 당시는 바다로 산줄기가 쭉 빠져나와 못 가운데 있는 것 같아 지형이 자라가 목을 길게 빼고 못을 물을 보고 내려오는 형국이고 간척이 되기 전에 앞과 좌우가 물이어서 연못 같이 보여 남생이의 ‘남’자와 못 ‘당’자를 따서 “남당(南塘)”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산 조선 태조때인 1390년경 경주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고, 봉두산 서남하 5리 지점과 취령산 서북하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두산과 취령산의 맥을 이은 중령산이 있어, 산맥의 중간산(中間山) 아래라 하여 “중산(中山)”이라 불렀다. 귀남이라는 지명은 “구남이”라고도 하는데 골몰 서쪽에 있으며 돌이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정 조선 고종 때 1880년경 제주고씨가 마을에 들어와 정착하였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 센 장사였으며,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마을 명을 고장자(高長者) 또는 고정(高丁)이라 불렀으나, 그 후 여산송씨가 입주하면서 “고정(高亭)”이라 고쳐 불렀다. 1930년 중산에서 분리되었고, 1963년에 신흥마을이 분리되어 나갔다.
신흥 대서면 남정리 단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남정(新南亭)이라 불리어 오다가 1963년 남정리 “고정(高亭)”마을에서 분리되어 득량만 간척지가 완공될 무렵 마을 이름을 “신흥(新興)”이라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른다.
안남리 장선 전설에 의하면 마을 주변경관이 수려하여 신선이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다하여 “장선(長仙)”이라 하였고, 득량만과 접한 마을에 백사장이 길게 형성되어 있어 “장사포”라 불러 오다가 1930년경 “장선(長善)”으로 고쳐 불렀다.
화천 화려하고 빛이 난 냇물이 마을의 양편 뒤에서 흘러 내려와 합류하므로 “빛내똠” 이라 부르다가 1930년 신기마을에서 분리되면서 “화천(華川)”으로 고쳐 불렀다.
신기 마을 형국이 도가지 같다 하여 “옹포”라하였는데, 본래는 “독개”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지도에는 옹포(甕浦)라 표기되어 있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안남지구 내남(內南)으로 불러오다가 1925년 내남마을에 “빛내똠”과 “새터”가 있어 빛내똠은 화천으로 새터는 신기마을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안동 마을 지형이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기러기 안(雁)자를 따서 “안골”이라 불렀고, 옛 흥양현 지도와 일제강점기 당시 지명을 보면 내동으로 되어 있어 안내(內)자의 “안”이 안(雁)자로 바뀐 것이며 골짜기 안쪽에 위치하므로 “안동(雁洞)이라 고친 후 오늘에 이른다.
봉계 마을이 형성될 무렵 터를 잡은 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자 길조라 생각하여 터를 닦아 마을 이름을 “박골(닭밭골)”이라 불렀다. 마을 서쪽에 오동나무가 매우 많아 “오동평”이라 불렀는데, 오동나무에는 봉(鳳)이 깃들인다하여 봉(鳳)자와 계(鷄)자를 합쳐 “봉계(鳳鷄)”라 불렀다.
화산리 화장 마을 뒷산 지형이 노서화전(老鼠禾田)의 형국으로 곡창을 뜻하여 예부터 “수맛”이라 불러 왔으며 또 구전에 마을 약 500m 지점 예삼시(芮三時)에 고양이 모양으로 된 바위가 있어 쥐들이 창고까지 오지 못하도록 웅크리고 있어 마치 곡식의 수를 받는 장소로써 노적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화장(禾場)이라 하였고 흥양현 고지도에는 화장과 평촌 근처에 사창(社倉)이 흥양현 70리에 있다고 표기되어있다.
평촌 마을 앞 3면이 모두 들판이므로 “들몰” 또는 평촌(坪村)이라 하였는데 본래 화장(禾場)마을에 속했다가 1956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촌마을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귀산 서한때는 남성매라 부르다가 마을 앞에 동백섬이 있고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으로 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귀산(龜山)이라 개명 오늘에 이른다.
서호 예전 남서면의 서쪽이므로 서면이라 하였다가 마을주변 지형이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목마른 용이 마륜천에서 흐르는 호수와 같은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서면의 서(西)자와 호수 호(湖)자를 합쳐 서호(西湖)라 불렀다.
송림리 송림 마을 뒷산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앞 지형은 황우도강형(黃牛渡江形)이라 하여 소나무 송(松)자와 황소는 숲을 좋아한다는 뜻의 수풀 림(林)자를 붙여 송림(松林)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인근 일대의 세곡과 특산물 등을 보관하였던 창고가 있어 포두면 해창과 함께 흥양2창3고(興陽2倉3庫)의 하나로 송림창(松林倉) 또는 사창(社倉)이라 불렸다. 이곳에는 창고건물 3동이 있었고 해로(海路)의 요형(要衡)이라 하여 감관(監官) 1인이 주재 했다.
장사 1986년 7월 14일 송림으로부터 분동, 마을 앞 긴 모래사장이 있어 장사마을이라 하였다.
송강리 신촌 지명이 없다가 1948년경 하남마을에서 분리되면서 마을 앞에 덕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신덕이라 불러오다가 그 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불렀다.
하남 남서면과 와용산 아랫마을로 한때 하남양 또는 와용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용남”이라 불렀으나 1926년 일제강점기 당시 “하남”으로 불렀다.
송강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산에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앞에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마을 명을 송강 이라하였다.
상남리 남양 남양은 소가 질매를 벗고 누워있는 것 같아 와우형인데 마을이 생길 당시 이곳을 지나가던 노승이 마을의 위치나 기후가 중국의 제갈공명이 밭을 갈던 남양과 같다고 하여 남양이라고 불렸다는 설과 고려말경 남양방씨가 설촌했다고 남양이라고 했다는 설이 전한다. 한때는 물이 많다고 하여 풍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편 남양 마을에 속해 있을 때는 새마을이라고 부르다가 1937년 일제강점기 당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양으로 부터 분리되면서 남양마을 동편에 위치한다 하여 동편이라 고쳐불렀다.
금곡 마을 앞에 가야금처럼 생긴 동산이 있고 ‘밤이면 가야금 소리가 들렸다’고하여 개골이라 칭하였으나 1930년경 가야로 불렀다가 1948년 금곡으로 고쳐 불렀다.
  • 관리부서

  • 연락처

  • 최종수정일

  • OPEN,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